• [칼럼] 숲에서 얻어온 웃음 한 조각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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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글쓴이 : 권영상작가
  • 18.01.25 09:40:34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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숲에서 얻어온 웃음 한 조각


산 정상에서 돌아설 때다. 귀룽나무 옆 눈 덮인 바위 위에 누군가 웃음 한 자락을 얹어두고 갔다.


나는 돌아서던 발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바위 위에 놓인 웃음을 들여다본다. 눈 위의 웃음이 내 몸속에 숨어있는 웃음을 자극한다.


간밤 눈이 내렸다. 밤이 이슥하도록 내렸다. 어디선가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밤에 눈이 내렸다. 산 부엉이 부엉부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 할머니는 속이 굽굽해 화롯불에 밤을 구워 호물호물 잡수실 그런 밤이었다.


아침에 옷을 잔뜩 껴입고 산에 올랐다. 눈 내린 산을 걸어 귀룽나무 고갯길을 돌아설 때다. 눈 덮인 편편한 바위에 누군가 얼굴 하나를 그려놓았다. 어설픈 그림이지만 웃음 짓는 얼굴이다.


내가 오기 조금 전 이쯤에서 누군가 그 무슨 생각으로 껄껄껄 웃다가 그 웃음 한 자락을 여기 옮겨 그려놓은 게 분명하다. 웃음소리가 그림 속에서 막 울려 나오는 듯하다.


그를 따라 나도 정적이 감도는 숲에서 슬쩍 웃어본다.


좀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초생달 눈썹에, 초생달 눈매에, 함뿍 웃느라 펀하게 벌린 좀 비뚤어진 커다란 입 모양새. 볼수록 장난스러운 웃음 그림이다.


바보 온달의 웃음만치야 안 되지만 동심이 배어있는 선한 웃음이다, 그 웃음이야 두말할 것 없는 이 그림을 그린 이의 웃음이다. 그러니까 나보다 조금 먼저 이 산길을 걸어간 그 사람의. 


눈 끝이라 새소리도 없고, 바람소리도 없는 이 조용한 산 속에 이런 웃음을 두고 갈 줄 아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. 돌아오면서 나는 그를 생각했다.


적적하다면 적적한 산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다가 제 속에 숨은 웃음을 꺼내어 한참을 웃다가 눈 위에 그려놓고 갔을까. 


욕심 없는, 입꼬리가 귀에 걸린 함박웃음. 


한참을 걸어 내려오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. 그의 웃음을 잊어버리기 전에 어딘가에 옮겨놓고 싶었다. 길가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하얀 눈 위에 나뭇가지를 세워 그의 웃음을 그렸다.


분명 그의 웃음을 옮겨 그렸는데, 그려놓고 보니 그의 웃음이 아닌 내 얼굴에 피던 나의 웃음이다. 


나는 또 내려오다가 그의 웃음이 잊혀질만 하면 멈추어 그의 웃음을 눈 위에 그렸다. 그 무렵이다. 내 앞을 지나가던 늙수레한 분이 눈 위에 그리는 내 그림을 보고 ‘그림을 잘 그리네요!’ 하신다. 그 말이 부끄러워 나는 크게 웃었다.


그분도 내 웃음을 보고 마주 크게 웃었다. 어쩌면 나나 그분이나 눈 위에 그린 웃음 얼굴을 따라 웃었는지 모른다.


이 그림을 보고 한바탕 웃으며 지나간 그 늙수레한 분도 내가 내려온 산길을 올라가며 나처럼 눈 위에 이 웃음 얼굴을 그릴지 모른다.


그분도 이 겨울 숲에서 얻은 웃음을 금방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을 테다. 인생을 그만큼 산 분이라면 길에서 얻은 소중한 웃음을 쉬이 버리지는 못할 테다.


아파트 마당에 들어설 때에 보니 아직도 내 손에 웃음 얼굴을 그리던 나뭇가지가 들려있다. 지난해 분꽃 피던 자리를 골라 웃음 얼굴을 하나 더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놓았다.


이 아침 산속에서 얻은 웃음 한 자락을 여기까지 데려왔다. 눈처럼 깨끗한 웃음이다. 오늘 하루가 행복할 것 같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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